길 이야기

권신 한명회의 정자, 압구정

현대아파트 단지 안 화단 옆에 압구정터 표지석이 서 있습니다. 갈매기와 벗하겠다던 정자 이름이 명품숍 거리의 이름이 되기까지의 이야기입니다.

주소찾기 편집팀 · · 수정 · 2분 읽기

아파트 단지 화단 옆에 선 압구정터 표지석과 그 너머 압구정로의 저녁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단지 안, 화단 옆에 표지석 하나가 서 있습니다. 여기 정자가 있었다는 표시입니다.

정자의 이름은 '압구정(狎鷗亭)'이었고, 지은 사람은 조선 초기 세조 즉위의 일등공신이자 최고 권력자였던 한명회(1415~1487)입니다. 압구정로라는 도로명은 한강 변에 있던 이 정자에서 왔습니다.

'압구(狎鷗)'는 '갈매기와 친하게 지낸다'는 뜻입니다. 중국 고사에서 온 표현으로, 속세를 떠나 자연과 벗하며 욕심 없이 살겠다는 은일(隱逸)의 뜻을 담았습니다. 이 이름을 지어준 사람은 한명회가 작명을 청한 명나라 사신 예겸(倪謙)이었습니다.

이름과 주인은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한명회는 영의정을 두 차례(1466년, 1469년) 지냈고, 예종과 성종 두 임금의 장인이 되었습니다. 갈매기와 벗하겠다는 정자의 주인이 조선에서 가장 힘센 사람이었던 셈입니다.

정자는 주인이 여러 번 바뀌었습니다. 19세기 말에는 철종의 부마 박영효의 소유였고, 1884년 갑신정변으로 박영효의 재산이 몰수될 때 정자도 함께 넘어갔다가 고종 말년에 돌아왔습니다. 완전히 사라진 것은 1970년대입니다. 영동개발로 현대아파트가 들어서면서 흔적도 없이 없어졌습니다.

그 이름은 지명으로 살아남아 현대 대한민국 '부와 명품의 1번지'인 압구정동이 되었습니다. 압구정 로데오거리, 갤러리아백화점, 청담동 명품거리가 모두 이 일대에 있습니다. 겉으로는 청빈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권력과 부를 추구했던 한명회의 정자 이름이, 500년 뒤 최고급 소비문화의 간판이 된 것입니다.

표지석 앞에서 도로 쪽으로 걸어 나오면 압구정로가 나옵니다. 갈매기와 벗하겠다는 이름을 단 그 길에는 지금 성형외과 간판과 명품숍 쇼윈도가 줄지어 서 있습니다.

알고 계셨나요? '압구정 오렌지족'은 1990년대 이 일대 부유층 자녀들을 부르던 신조어였습니다. 어원은 설이 갈립니다. 부유층 유학생이 몰려 있던 미국 오렌지카운티에서 왔다는 설과, 당시 귀했던 수입 오렌지에서 왔다는 설이 함께 전합니다. 지금 압구정 로데오거리에는 명품숍과 성형외과가 밀집해 'K-뷰티'와 'K-패션'의 성지로 불립니다.

참고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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