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명 이야기
권신 한명회의 정자, 압구정
압구정로는 조선 초기 세조 즉위의 일등공신이자 최고 권력자였던 한명회(1415~1487)가 한강 변에 지은 정자 '압구정(狎鷗亭)'에서 유래했습니다.
'압구(狎鷗)'는 '갈매기와 친하게 지낸다'는 뜻으로, 중국 고사에서 유래한 표현입니다. 속세를 떠나 자연과 벗하며 욕심 없이 살겠다는 은일(隱逸)의 의미를 담았죠. 하지만 정작 한명회는 당대 최고의 권력자로, 영의정을 4번이나 역임했고 왕의 장인이 되었습니다. 그의 정자 주변은 권세를 얻으려는 사람들로 늘 북적였다고 합니다. 갈매기는커녕, 아첨꾼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던 셈이죠.
한명회가 죽고 수백 년이 흐른 뒤, 압구정은 홍수로 유실되어 사라졌습니다. 지금은 현대아파트 단지 내에 압구정터 표지석만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름은 지명으로 남아, 현대 대한민국 '부와 명품의 1번지'인 압구정동이 되었습니다.
이 역사적 아이러니는 인상적입니다. 겉으로는 청빈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권력과 부를 추구했던 한명회의 정자 이름이, 500년 후 대한민국 최고급 소비문화의 상징이 된 것이죠. 압구정 로데오거리, 갤러리아백화점, 청담동 명품거리가 모두 이 일대에 있습니다. 역사는 이렇게 순환하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