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이야기

전쟁의 상처에서 피어난 화채 그릇

가칠봉에 오른 종군기자가 던진 한마디가, 지금 이 마을 사람들이 등본에 적는 도로명이 되었습니다.

주소찾기 편집팀 · · 수정 · 2분 읽기

산줄기에 그릇처럼 둘러싸인 양구 해안분지와 그 바닥을 가로지르는 펀치볼로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 DMZ 바로 남쪽. 해발 1,000m가 넘는 대암산과 대우산에 둘러싸인 땅이 움푹 내려앉아 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 종군기자가 가칠봉에 올라 이 분지를 내려다보며 "마치 펀치 볼(Punch Bowl, 파티용 화채 그릇) 같다"고 표현했습니다. 산줄기가 그릇의 테두리, 분지 바닥이 그릇 안이었던 셈입니다.

한국어로는 '해안분지'라고 부르지만, 영어 이름인 '펀치볼'이 더 유명합니다.

1951년 8월 31일부터 9월 20일까지 이곳에서 '펀치볼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미 제1해병사단과 국군 해병 제1연대가 분지 북쪽 고지를 놓고 인민군 제3군단과 맞붙은 고지전이었습니다.

전투가 끝난 뒤에도 이 일대는 민간인통제선 안쪽에 남았습니다. 그렇다고 사람이 살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1956년 피난민 정착사업의 하나로 재건촌이 조성되면서 개척민들이 들어와 밭을 일궜고, 그 마을이 지금까지 이어집니다. 출입에 절차가 따르는 땅에서 농사와 생활이 계속됐다는 뜻입니다.

그 덕분에 역설적으로, 펀치볼은 한국에서 손꼽히게 원시적인 자연생태계가 남은 곳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DMZ 평화관광의 명소로 사랑받습니다. 가을이면 억새밭이 장관을 이루고, 겨울에는 설경이 아름답습니다.

원래의 행정 지명인 '해안(亥安)'에도 사연이 있습니다. 옛날 이 마을에 뱀이 극성을 부려 주민들이 고통받자, 지나가던 승려가 "뱀의 천적인 돼지(亥)를 많이 기르면 평안(安)해질 것"이라 조언했고, 그 뒤로 정말 뱀이 사라졌다는 전설이 전해집니다.

펀치볼로는 분지 안에만 있는 길이 아닙니다. 양구군 동면 쪽 건물번호 10번대에서 시작해 해안면 1,300번대까지, 산을 넘어 분지 바닥으로 내려갑니다. 종군기자가 무심코 던진 비유가, 이곳 주민들이 등본과 택배 송장에 적는 도로명으로 남았습니다.

알고 계셨나요? 펀치볼은 지금도 민간인통제선 안쪽이라 출입에 절차가 따릅니다. 그 덕에 천연기념물 산양이 서식하는 생태계의 보고로 남았습니다. '최전방의 오지마을'로 유명한 을지전망대와 가까워 DMZ 안보관광의 필수 코스로 꼽힙니다.

참고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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