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의 공격을 막아낸 산성, 그 아래를 도는 길
1593년 권율이 지킨 토성이 위에 있고, 그 아래 한강 쪽으로 장어와 국수를 파는 식당이 늘어선 길입니다.

1593년 2월, 한강을 등진 흙 토성 하나가 하루 동안 일곱 번 공격받았습니다. 일곱 번 다 버텼습니다.
행주로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강매동과 행주내동을 지나는 길입니다. 건물번호는 8번부터 134번까지, 행주대첩(幸州大捷)의 전적지인 행주산성을 껴안고 돕니다.
임진왜란 당시 이 토성을 지킨 것은 권율이었습니다. 병력 규모는 기록마다 다릅니다. 고양시 행주산성 공식 안내는 "조방장 조경과 승장 처영 등 정병 2,300명"이라 적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의병과 승병까지 합쳐 "1만 명이 못 되었다"고 씁니다. 반대편 일본군은 두 기록이 모두 3만여 명으로 잡습니다.
조선군은 화차와 수차석포, 비격진천뢰 같은 화기를 동원해 일곱 차례의 공격을 차례로 막아냈습니다. 화살과 돌이 바닥을 드러낸 순간이 있었고, 성 안 사람들이 돌을 주워 날랐다는 이야기가 여기서 나옵니다.
이 이야기가 '행주치마'의 어원이라는 설명이 널리 퍼져 있습니다. 국어사 쪽 근거는 다른 곳을 가리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행주'를 그릇을 훔치거나 씻을 때 쓰는 헝겊으로 풀이하고, 'ᄒᆡᇰᄌᆞ쵸마'라는 어형이 최세진의 『사성통해』(1517)와 『훈몽자회』(1527)에 이미 보인다고 적습니다. 임진왜란보다 75년 앞선 문헌입니다.
그러니 행주치마는 전투에서 생긴 말이 아니라, 전투의 기억이 나중에 그 말에 얹힌 쪽에 가깝습니다. 백과사전도 유래담을 "전한다"는 형태로만 실어 둡니다.
오늘날 행주로를 따라가면 권율을 모신 충장사가 있습니다. 그 아래 한강을 바라보는 자리에는 장어와 국수를 파는 식당들이 줄지어 주말 나들이객을 맞이합니다. 산성 위에서 내려다보면 일곱 번의 공격이 올라왔던 비탈이 그대로 보입니다.
알고 계셨나요? 행주대첩에서 쓰인 '화차'는 변이중이 만든 변이중 화차입니다. 승자총통 40문을 수레에 얹어 철환을 곧바로 쏘는 화기로, 불화살 100발을 한꺼번에 날리는 문종화차·신기전기화차와는 다른 물건입니다. 흔히 둘을 같은 무기로 소개하지만 발사체부터 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