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이야기

3·1 독립운동의 함성이 울려 퍼진 길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탑골공원 단상에서 읽힌 선언서 한 장이 이 길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주소찾기 편집팀 · · 수정 · 2분 읽기

3·1운동 장면을 새긴 부조가 이어지는 탑골공원 담장과 그 바깥 삼일대로

1919년 3월 1일 오후, 탑골공원 팔각정 단상에 한 사람이 올라섰습니다. 기다리던 민족대표들이 끝내 나타나지 않은 뒤였습니다.

삼일대로는 용산구 한남동 726-110에서 시작해 중구를 거쳐 종로구 재동 99-1에서 끝나는 4,700m의 도로입니다. 용산·중·종로 세 자치구에 걸치고, 낙원동은 그 중간쯤입니다. 숫자 '3·1'은 1919년 3월 1일을 가리킵니다.

그날 이 길 위의 탑골공원(파고다공원)에서 기미독립선언서가 낭독됐습니다. "오등(吾等)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로 시작되는 첫 구절이 울려 퍼지자, 군중이 일제히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습니다.

단상에 오른 사람은 정재용(1886~1976)으로 전해집니다. 흔히 '학생 대표'로 소개되지만 그는 1911년 경신학교를 졸업했고, 1919년 당시 서른둘이었습니다. 목격자 증언을 근거로 경성의학전문학교 재학생 한위건이었다는 견해도 나란히 남아 있습니다.

그 함성은 곧 전국으로 번졌습니다.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3월부터 5월까지 참여 인원을 202만여 명으로 추산했습니다. 어느 쪽 집계든 무기를 든 사람은 없었습니다.

탑골공원 자리에는 고려 때부터 흥복사가 있었습니다. 조선 태종이 이 절을 폐했고, 1464년(세조 10) 세조가 그 터에 절을 다시 세우며 이름을 원각사(圓覺寺)로 바꿨습니다. 절을 세운 임금과 없앤 임금이 자주 뒤바뀌어 알려져 있습니다.

그 절의 탑인 '서울 원각사지 십층석탑'이 지금도 공원 안에 서 있습니다. 예전에는 '국보 제2호'로 불렀지만, 2021년 문화재보호법 시행령 개정으로 국보·보물의 지정번호 표기가 없어졌습니다. 지금 공식 명칭에는 번호가 붙지 않습니다.

서양식 공원으로 꾸민 것은 1897년, 고종의 명을 받은 영국인 해관 총세무사 존 맥리비 브라운이었습니다. 일반에 문을 연 것은 1920년입니다. 이름은 오래 '파고다공원'이었다가 1992년 탑골공원으로 돌아왔습니다.

3·1운동은 중국의 5·4운동에 영향을 주었고, 그해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졌습니다.

삼일대로를 걷다 보면 그날의 흔적이 담장에 붙어 있습니다. 탑골공원 담장에는 3·1운동 당시의 장면을 새긴 부조 벽화가 이어져 있고, 공원 안에는 손병희 선생 동상과 3·1운동 기념비가 서 있습니다.

매년 3월 1일에는 같은 자리에서 독립선언서 낭독 행사가 재현됩니다. 나머지 날에도 부조 벽화는 그대로 서 있고, 담장 바로 바깥은 삼일대로의 차선입니다.

알고 계셨나요? 기미독립선언서는 최남선이 기초하고 손병희 등 33인이 서명했습니다. 원래 낭독 장소는 탑골공원이었지만 민족대표들은 당일 인사동 태화관으로 장소를 바꿨습니다. 지방에 있던 길선주·유여대·김병조·정춘수가 오지 못해 모인 사람은 29인이었고, 태화관에서는 선언서를 낭독하지 않았습니다. 한용운의 짧은 인사말과 만세삼창으로 끝낸 뒤 스스로 일본 경찰에 알렸다는 것이 통설입니다.

참고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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